실록 實錄

실록  實錄

실록은 원래 ‘믿을 만한 기록’이라는 일반 명사로 쓰이다가, 실록 편찬이 관례화되면서 우리가 아닌 특정한 역사 기록을 실록이라는 고유 명사로 부르게 되었다. 실록은 중국 당나라 태종(太宗) 때부터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실록의 편찬은, 사관(史官) 가문 출신의 세습직 사관이 아닌 관청의 임명직 사관에 의해 역사가 편찬되기 시작한 제도적 배경과 때를 같이 하여 시작되었다. 또한 실록은 군주의 재위 기간 중에 편찬되다가 연호 단위로 편찬되기도 했으며, 당나라 후반에 이르러 군주 재위 단위로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사에서는 통일 신라 말부터 실록이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데, 불교 사회였던 고려 시대보다 신유학, 즉 성리학이 주도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에 역사 편찬이 한결 중시되었고, 실록 편찬도 새로운 국왕이 상복을 벗고 집무를 시작하는 졸곡(卒哭)에 맞추어 시작되는 관례가 정착되었다. 실록이 갖는 최고 국가 기록으로서의 위상에 더하여, 이러한 관례화는 상전(賞典), 세초연(洗草宴), 봉안식(奉安式) 등 실록을 둘러싼 의례(儀禮)를 발전시켰다.

현재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만 남아 있는데, 태조(太祖)부터 제25대 철종(哲宗)에 이르기까지 모두 1,893권 888책으로서 조선 시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전 분야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연산군대와 광해군대의 것은 이름이 각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로 되어 있으나, 이는 이 두 임금이 반정(反正)으로 퇴위당했기 때문에 격을 낮춘 것일 뿐 형식이나 내용은 다른 왕대의 실록과 차이가 없다. 대부분 활자로 간행되었으나, 일부는 필사본(筆寫本)으로 되어 있다.

실록은 춘추관(春秋館)에서 작성한 시정기(時政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여러 사관이 작성한 사초(史草)를 기본 자료로 삼고, 그 밖에 비변사(備邊司)에 보고된 지방관의 장계축(狀啓軸), 의금부(義禁府)의 추안(推案), 형조(刑曹)의 주요 문서, 추국일기(推鞫日記) 등을 수집하여 보조 자료로 삼았다. 또 외국과 오고간 외교 문서에서 주요 내용을 발췌하고, 명신(名臣)의 졸기(卒記)는 관련 문집(文集)이나 비문(碑文), 지문(誌文)과 그에 대한 당대의 공의(公議)를 수집하여 보완하였다.

실록은 국가의 주요 기록 중에서 영구 보존이 필요한 기록을 후대에 남기는 것으로, 기록학의 개념으로 보면 ‘archives’로 볼 수 있다. 즉, 사초나 기타 기록 중에서 평가하여 보존 가치가 있는 기록을 남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절(刪節)은 통상 14개 조항의 원칙에 의해 이루어졌고, 정조실록(正祖實錄) 편찬 때부터 『일성록(日省錄)』의 영향으로 찬수 범례에 변동이 생겼다.

실록은 당대에는 공개되지 않는 특수한 성격을 지닌 기록이었다. 오직 후대, 정확히 말하면 해당 왕조가 끝난 뒤에나 공개될 운명을 지닌 기록이었다. 이런 비공개성은 기술 발전이나 기록 활용 계층의 제한 등 여러 역사적 조건에서 발생한 특성이겠지만, 원래의 우수한 역사 기록으로서의 역할에 더하여 관료 사회의 자정성(自淨性)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실록은 실록청(實錄廳)에서 편찬하였다. 실록청은 춘추관 소속의 임시 기구이다. 실록청은 인원이나 물자를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받아 실록을 만들었다. 실록청은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궁궐이나 궁궐 인근의 관서에 설치하였다. 전체 업무를 주관하는 도청(都廳)과 실제 편찬 업무를 담당하는 일방(一房), 이방(二房), 삼방(三房)과 조판(組版)과 간인(刊印), 제책(製冊) 등 기술적인 실무를 담당하는 별공작(別工作) 등으로 구성되었다. 총책임자를 총재관(總裁官)이라 하고, 각 부서의 책임을 맡은 당상관(堂上官)과 실무자인 낭청(郎廳)이 활동하였다. 여기에 서리나 장인(匠人), 다모(茶母) 등도 실록청 운영의 구성원이었다.

당상관과 낭청은 본래 소속된 관서의 직무를 면제받고, 실록청 청사에 매일 출근하여 근무하였고, 모든 공회(公會)에 참석하지 않으며, 다른 직무를 맡지 않았다. 상(喪)을 당했을 때나 휴가를 당하더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비리를 조사받게 되더라도 공죄(公罪)나 사죄(私罪)를 따지지 말고 모두 공무를 계속 담당하도록 하였다. 승지(承旨)나 대간(臺諫)에 임명되었을 때는 구례에 따라서 다른 직책으로 바꾸지 말며, 낭청 중에 만약 파직되는 인원이 있으면 바로 임금께 보고하여 군직(軍職)을 주어 관(冠)을 쓰고 각대(角帶)를 띠고 근무하게 하였다. 월과(月課) · 전경(專經) · 시사(試射) · 삭서(朔書) 등 시험을 보게 된 인원은 전례에 따라서 모두 빠지도록 배려되었다.

한림(翰林) 가운데 한 사람은 실록청에 근무하며 임무를 살피게 하였다. 별공작 감역관(監役官) 1명은 선공감(繕工監)에서 정해 실록청으로 보내게 하였다. 각 방의 서리(書吏) 70명은 여러 관사에서 일한 대가로 요포(料布)를 받는 서리를 뽑아다 일을 시키며, 서사(書寫) 1명과 고지기(庫直) 4명, 사령(使令) 17명은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에서 요포를 나누어주게 하여 실록청에서 일을 하게 하였다. 사초를 베껴낼 때 들어가는 종이[지지紙地]와 붓과 먹 그리고 기타 필요한 물건 및 특정 아문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관원의 깔자리[포진鋪陳] 등은 담당 조에서 마련하도록 하였다. 청사를 지키는 군사 및 시중 드는 다모는 각 담당 관사에서 정해서 보내게 하였다.

한편 실록은 아무나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은 아니지만, 국가 정책이나 전례에 참고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고출(考出) 또는 상고(相考)에는 반드시 전임 사관인 한림이 있어야 수행할 수 있었다.

실록은 관리도 엄격히 하였다. 실록은 3년에 1번 포쇄(曝曬)하였다. 포쇄는 책을 그늘에서 바람을 쐬어 말리는 것으로서 거풍(擧風)이라고도 한다. 한림 한 사람이 왕명(王命)을 받아 사고에 내려가서 관리 상태를 살핀 후, 포쇄하였다.

오늘날 실록은, 영인본(影印本)뿐만 아니라 번역본이 책과 CD 등으로 제작되었고,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는 원문과 번역본을 웹 사이트에 공개하는 등, 조선 시대를 이해하는 기본 자료로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식별번호 : AD-PM00004


표제어 : 실록


대역어 : 實錄


정의 및 해설 : 실록은 원래 ‘믿을 만한 기록’이라는 일반 명사로 쓰이다가, 실록 편찬이 관례화되면서 우리가 아닌 특정한 역사 기록을 실록이라는 고유 명사로 부르게 되었다. 실록은 중국 당나라 태종(太宗) 때부터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실록의 편찬은, 사관(史官) 가문 출신의 세습직 사관이 아닌 관청의 임명직 사관에 의해 역사가 편찬되기 시작한 제도적 배경과 때를 같이 하여 시작되었다. 또한 실록은 군주의 재위 기간 중에 편찬되다가 연호 단위로 편찬되기도 했으며, 당나라 후반에 이르러 군주 재위 단위로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사에서는 통일 신라 말부터 실록이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데, 불교 사회였던 고려 시대보다 신유학, 즉 성리학이 주도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에 역사 편찬이 한결 중시되었고, 실록 편찬도 새로운 국왕이 상복을 벗고 집무를 시작하는 졸곡(卒哭)에 맞추어 시작되는 관례가 정착되었다. 실록이 갖는 최고 국가 기록으로서의 위상에 더하여, 이러한 관례화는 상전(賞典), 세초연(洗草宴), 봉안식(奉安式) 등 실록을 둘러싼 의례(儀禮)를 발전시켰다.

현재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만 남아 있는데, 태조(太祖)부터 제25대 철종(哲宗)에 이르기까지 모두 1,893권 888책으로서 조선 시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전 분야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연산군대와 광해군대의 것은 이름이 각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로 되어 있으나, 이는 이 두 임금이 반정(反正)으로 퇴위당했기 때문에 격을 낮춘 것일 뿐 형식이나 내용은 다른 왕대의 실록과 차이가 없다. 대부분 활자로 간행되었으나, 일부는 필사본(筆寫本)으로 되어 있다.

실록은 춘추관(春秋館)에서 작성한 시정기(時政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여러 사관이 작성한 사초(史草)를 기본 자료로 삼고, 그 밖에 비변사(備邊司)에 보고된 지방관의 장계축(狀啓軸), 의금부(義禁府)의 추안(推案), 형조(刑曹)의 주요 문서, 추국일기(推鞫日記) 등을 수집하여 보조 자료로 삼았다. 또 외국과 오고간 외교 문서에서 주요 내용을 발췌하고, 명신(名臣)의 졸기(卒記)는 관련 문집(文集)이나 비문(碑文), 지문(誌文)과 그에 대한 당대의 공의(公議)를 수집하여 보완하였다.

실록은 국가의 주요 기록 중에서 영구 보존이 필요한 기록을 후대에 남기는 것으로, 기록학의 개념으로 보면 ‘archives’로 볼 수 있다. 즉, 사초나 기타 기록 중에서 평가하여 보존 가치가 있는 기록을 남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절(刪節)은 통상 14개 조항의 원칙에 의해 이루어졌고, 정조실록(正祖實錄) 편찬 때부터 『일성록(日省錄)』의 영향으로 찬수 범례에 변동이 생겼다.

실록은 당대에는 공개되지 않는 특수한 성격을 지닌 기록이었다. 오직 후대, 정확히 말하면 해당 왕조가 끝난 뒤에나 공개될 운명을 지닌 기록이었다. 이런 비공개성은 기술 발전이나 기록 활용 계층의 제한 등 여러 역사적 조건에서 발생한 특성이겠지만, 원래의 우수한 역사 기록으로서의 역할에 더하여 관료 사회의 자정성(自淨性)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실록은 실록청(實錄廳)에서 편찬하였다. 실록청은 춘추관 소속의 임시 기구이다. 실록청은 인원이나 물자를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받아 실록을 만들었다. 실록청은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궁궐이나 궁궐 인근의 관서에 설치하였다. 전체 업무를 주관하는 도청(都廳)과 실제 편찬 업무를 담당하는 일방(一房), 이방(二房), 삼방(三房)과 조판(組版)과 간인(刊印), 제책(製冊) 등 기술적인 실무를 담당하는 별공작(別工作) 등으로 구성되었다. 총책임자를 총재관(總裁官)이라 하고, 각 부서의 책임을 맡은 당상관(堂上官)과 실무자인 낭청(郎廳)이 활동하였다. 여기에 서리나 장인(匠人), 다모(茶母) 등도 실록청 운영의 구성원이었다.

당상관과 낭청은 본래 소속된 관서의 직무를 면제받고, 실록청 청사에 매일 출근하여 근무하였고, 모든 공회(公會)에 참석하지 않으며, 다른 직무를 맡지 않았다. 상(喪)을 당했을 때나 휴가를 당하더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비리를 조사받게 되더라도 공죄(公罪)나 사죄(私罪)를 따지지 말고 모두 공무를 계속 담당하도록 하였다. 승지(承旨)나 대간(臺諫)에 임명되었을 때는 구례에 따라서 다른 직책으로 바꾸지 말며, 낭청 중에 만약 파직되는 인원이 있으면 바로 임금께 보고하여 군직(軍職)을 주어 관(冠)을 쓰고 각대(角帶)를 띠고 근무하게 하였다. 월과(月課) · 전경(專經) · 시사(試射) · 삭서(朔書) 등 시험을 보게 된 인원은 전례에 따라서 모두 빠지도록 배려되었다.

한림(翰林) 가운데 한 사람은 실록청에 근무하며 임무를 살피게 하였다. 별공작 감역관(監役官) 1명은 선공감(繕工監)에서 정해 실록청으로 보내게 하였다. 각 방의 서리(書吏) 70명은 여러 관사에서 일한 대가로 요포(料布)를 받는 서리를 뽑아다 일을 시키며, 서사(書寫) 1명과 고지기(庫直) 4명, 사령(使令) 17명은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에서 요포를 나누어주게 하여 실록청에서 일을 하게 하였다. 사초를 베껴낼 때 들어가는 종이[지지紙地]와 붓과 먹 그리고 기타 필요한 물건 및 특정 아문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관원의 깔자리[포진鋪陳] 등은 담당 조에서 마련하도록 하였다. 청사를 지키는 군사 및 시중 드는 다모는 각 담당 관사에서 정해서 보내게 하였다.

한편 실록은 아무나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은 아니지만, 국가 정책이나 전례에 참고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고출(考出) 또는 상고(相考)에는 반드시 전임 사관인 한림이 있어야 수행할 수 있었다.

실록은 관리도 엄격히 하였다. 실록은 3년에 1번 포쇄(曝曬)하였다. 포쇄는 책을 그늘에서 바람을 쐬어 말리는 것으로서 거풍(擧風)이라고도 한다. 한림 한 사람이 왕명(王命)을 받아 사고에 내려가서 관리 상태를 살핀 후, 포쇄하였다.

오늘날 실록은, 영인본(影印本)뿐만 아니라 번역본이 책과 CD 등으로 제작되었고,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는 원문과 번역본을 웹 사이트에 공개하는 등, 조선 시대를 이해하는 기본 자료로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채택어 구분 : 채택어


시대구분 : 전근대


언어 : 한국어


용어분류 : 전근대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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